영화 배트맨 감상 후기 (조커 연기, 배트맨 코스튬, 고담시)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영화로 슈퍼히어로물을 장르물이 아닌 범죄 드라마로 다시 썼다. 고담시라는 도시가 어떻게 캐릭터가 됐는지부터 살펴본다.
조커 연기 — 히스 레저가 최고라는 말, 저는 반만 동의합니다
일반적으로 역대 최고의 조커는 히스 레저라는 게 정설처럼 굳어져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어왔는데, 1989년 버전을 다시 보고 나서 생각이 흔들렸습니다. 잭 니콜슨의 조커는 심리적 공포보다 원초적 광기에 가깝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행동들이 이어질 때마다 조금씩 놀라게 되는데, 그 날것의 에너지는 히스 레저와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히스 레저의 조커가 관객을 불안하게 만드는 방식은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이야기 속에서 인물이 어떻게 변화하고 영향을 미치는지의 구조에 기댑니다. 반면 니콜슨은 매 장면을 즉흥적인 에너지로 채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게 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논리가 없으니까요.
재밌는 사실도 하나 있습니다. 영화 속 독약 브랜드로 등장하는 스마일렉스(Smilex)는 팀 버튼 감독의 다른 작품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치약 공장 브랜드로 다시 등장합니다. 조커가 마지막 추락 후 주머니에서 들리는 웃음 소리도 그냥 연출 효과가 아닙니다. 1970년대에 실제 유통되었던 녹음 장난감을 소품으로 사용한 설정이었고, 이 웃음 주머니는 2023년 개봉한 플래시에도 이스터에그(Easter Egg), 즉 제작진이 숨겨둔 팬을 위한 비밀 요소로 다시 등장합니다. 이런 식으로 레퍼런스(Reference), 다시 말해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심어둔 문화적 인용이 수십 년을 관통하며 작동한다는 게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더 배트맨의 리들러 연기도 저는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얼굴이 밝혀지기까지 두 시간 넘게 걸리지만, 처음 등장하는 순간부터 이미 실존할 것 같은 공기를 풍깁니다. 겉으로는 평범하고 순해 보이는데 머리는 치밀한 사람, 그 조합이 현실감 있게 느껴졌습니다. 예전에 유튜브에서 실제 범죄자 관련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그 느낌과 겹쳐지면서 오히려 더 섬뜩했습니다.
배트맨 코스튬 — 디테일에 공들인 흔적은 보이는데
더 배트맨에서 배트맨 코스튬(Costume), 즉 캐릭터가 착용하는 의상과 장비 일체는 역대 시리즈 중 가장 공들인 결과물로 보입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방탄 소재의 질감, 손바느질 느낌이 나는 박음질까지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는 겁니다. 배트카(Batmobile) 역시 기존과 달리 근육질 머슬카에 가까운 디자인인데, 이 부분은 솔직히 이질감이 들었습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현재와 비슷한 시점임에도 배트카의 디자인 언어는 구시대적입니다. 레트로 퓨처리즘(Retro Futurism), 즉 과거의 미래 상상을 현재에 재해석하는 미학 개념으로 보면 의도된 선택이겠지만, 처음에는 왜 저걸 썼나 싶었습니다. 나중에 영화 전체의 톤이 1940년대 필름 누아르(Film Noir), 다시 말해 어두운 조명과 도덕적 모호함을 중심으로 한 범죄 영화 장르에 의도적으로 맞춰져 있다는 걸 알고 나서야 납득이 됐습니다.
다만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코스튬과 장비에 이렇게 공을 들였는데, 정작 늘어지는 장면들이 중간중간 섞이면서 그 디테일이 묻혀버렸습니다. 제가 봤을 때 슬로우 모션 연출이 불필요하게 반복된 구간이 적지 않았는데, 거기서 집중이 흩어지다 보니 장비나 의상에 담긴 공이 덜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다크나이트 시리즈와 더 배트맨을 코스튬 관점에서 비교하면 이렇게 정리됩니다.
- 다크나이트 시리즈 — 기능성과 현실감에 집중. 배트슈트는 방어구 느낌이 강하고, 배트카는 군용 차량 파생형으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 더 배트맨 — 수공예적 질감과 다크 필름 누아르 미학 강조. 배트카는 레트로 디자인으로 호불호가 갈렸습니다.
- 1989년 팀 버튼 버전 — 고딕 판타지 분위기에 맞춰 코스튬과 배트카 모두 과장된 실루엣. 현실감보다 연극적 완성도를 우선했습니다.
영화 의상과 프로덕션 디자인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IMDb 더 배트맨 페이지의 트리비아 항목에서도 제작진의 의도를 일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담시 — 배트맨이 주인공인가, 도시가 주인공인가
더 배트맨을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건 배트맨이 아니라 고담시(Gotham City)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배트맨 영화는 배트맨의 이야기라고 알려져 있지만, 더 배트맨만큼은 고담시의 이야기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영화 후반부 고담시 전체가 침수되는 장면에서 보이는 시청, 도서관, 거리 풍경은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봤던 장면들과 묘하게 겹쳤습니다. 의도한 오마주(Hommage)인지, 그냥 비슷한 도시 세트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 장면에서 고담이라는 공간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캐릭터처럼 기능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특히 사회 지도층의 부패 구조를 파고드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는 고담의 권력층이 실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 역학관계가 리들러의 수수께끼를 통해 하나씩 드러나는 구조입니다. 다크나이트 시리즈에서도 배트맨의 아버지가 완전히 깨끗한 인물은 아니라는 뉘앙스가 있었는데, 더 배트맨은 그걸 훨씬 정면으로 다뤘습니다. 도시의 부패가 배트맨 자신의 정체성 혼란과 직결되는 방식이 꽤 공들인 구조라고 봅니다.
배트맨의 서사 구조 측면에서도 더 배트맨은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배트맨이 되기 이전이 아니라, 막 배트맨이 되기 시작한 시점을 다루는 영화입니다. 오리진 스토리(Origin Story), 즉 히어로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이야기라고 보기엔 이미 활동을 시작했고, 완성형 배트맨이라 보기엔 아직 너무 흔들립니다.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도 이 작품이 배트맨보다 탐정 누아르 장르에 가깝다는 평론가 분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출처: Rotten Tomatoes). 저는 그 미숙함이 오히려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더 배트맨은 전작을 기대하고 가면 실망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다크나이트와 비교하거나 조커 단독 영화의 세계관을 기대하면 둘 다 아닌 느낌이 들 겁니다. 하지만 이걸 완전히 새로운 배트맨 이야기, 고담시라는 도시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꽤 다르게 보입니다. 제가 다시 보면서 느낀 건 첫 관람 때보다 고담시와 캐릭터들의 관계가 훨씬 선명하게 읽혔다는 것입니다. 배트맨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전작 비교는 잠깐 내려놓고 보시길 권합니다.
--- 참고:https://youtu.be/bnHwUyZB8pM?si=wIvc-k-dIDJWaZC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