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 감상 후기(톤앤매너, 캐릭터, 감동)

왕과 사는 남자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포스터만 봤을 때는 묵직한 정극 사극이 나오겠구나 싶었는데, 막상 극장 안에서 느낀 건 그보다 훨씬 복잡한 감정이었습니다. 좋다 나쁘다를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영화였고,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 일반적으로 유해진이 나오면 믿고 본다고들 하는데, 이번엔 그 말이 반은 맞고 반은 아쉬웠습니다.

톤앤매너: 비극과 희극이 섞이면 감동이 될까

영화를 보기 전에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드라마화했는지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계유정난이란 1453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권을 빼앗고 반대파 신하들을 숙청한 쿠데타를 말합니다. 조선사에서도 손꼽히는 비극적 정변인 만큼, 이걸 소재로 삼은 작품이라면 어느 정도의 무게감은 기본으로 깔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단종 파트는 그 기대에 꽤 부응했습니다. 박지훈 배우가 연기하는 단종은 세상을 다 잃어버린 어린 왕의 공허함을 제법 설득력 있게 전달했고, 영월 유배지로 향하는 장면들의 톤은 정말 묵직했습니다. 제가 직접 봤는데, 이 도입부만큼은 진짜 '정극 사극'의 냄새가 났습니다.

문제는 어몽도 파트가 시작되면서입니다. 톤앤매너(tone and manner)란 영화나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감정의 결과 표현 방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단종이 나올 때와 어몽도가 나올 때의 톤앤매너가 너무 달라서, 보는 내내 온도 차이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열탕에서 냉탕으로 갑자기 뛰어드는 느낌이라고 하면 딱 맞습니다. 불편한 스위칭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비극과 희극을 교차하면 긴장 완화 효과가 생긴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그건 희극 파트가 메인 서사를 방해하지 않을 때 이야기입니다. 이번 영화는 두 파트가 거의 대등한 비중으로 충돌하고 있어서, 어느 쪽에도 제대로 몰입하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어몽도가 다른 마을 촌장과 유배지 유치를 위해 PPT 경쟁을 벌이는 장면은, 바로 앞 컷에서 단종이 유배 가마를 타고 있던 것과 병치되면서 의도치 않게 코미디가 되어버렸습니다.

캐릭터: 유해진은 훌륭했고

저도 처음엔 어몽도 캐릭터 설정 자체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역사 속 엄흥도(嚴興道)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실존 인물로, 삼족을 멸하겠다는 어명까지 내려진 상황에서도 이를 감행한 사람입니다. 엄흥도란 조선 세조 시대에 강원도 영월의 호장(戶長), 즉 지역 행정을 담당하던 하급 관리였습니다. 이 인물을 어몽도라는 이름의 주인공으로 재해석한 것 자체는 충분히 흥미로운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 속 어몽도는 전반부 내내 양반한테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노리는 속물로 그려집니다. 개그 캐릭터로서 기능하게 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이 설정이 너무 오래 유지되다 보니 후반부에 그가 목숨을 걸고 순고한 선택을 하는 장면에서 설득력이 확 떨어졌습니다. 일관성이 흔들리는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해가는 성장의 궤적이 너무 갑작스럽게 꺾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해진 배우 자체는 정말 달랐습니다. 클라이맥스에서 활시위로 만든 올가미, 즉 활줄을 손에 쥐고 잡아당기는 장면에서 울분에 찬 눈물과 목소리는, 제가 영화를 다시 떠올리는 지금도 가슴이 먹먹합니다. 이 장면은 단종의 죽음과 관련된 야사(野史), 즉 정식 사료에 기록되지 않은 비공식 전승을 각색한 것인데, 하인 대신 어몽도를 그 자리에 놓은 선택이 영화 전체의 감정을 이 한 장면에 응축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작동했습니다. 배우가 시나리오의 빈틈을 메운 드문 사례라고 봤습니다.

반면 광청골 주민들은 끝까지 존재감을 얻지 못했습니다. 단종이 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각성한다는 서사의 전제가 되는 인물들인데, 영화 내내 누가 누군지 기억하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이게 왜 문제냐면, 단종의 결의가 감동적으로 다가오려면 그가 지키려는 대상이 관객에게도 소중하게 느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제가 무너지면 주인공의 희생이 아무리 비장해도 공허해집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적 결함은 연기로 덮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이 영화에서 아쉬운 캐릭터 설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어몽도의 캐릭터 아크가 전반부 개그 설정과 후반부 순고한 결단 사이에서 충분히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2. 광청골 주민들에게 고유한 개성이 부여되지 않아 단종의 각성 계기로서 설득력이 약했습니다.
  3. 빌런인 한명회는 배우의 존재감 덕분에 위협의 실체성이 잘 전달됐지만, 그에 맞서는 주인공 측의 서사적 단단함이 상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감동: 이 영화가 그래도 남기는 것

비판을 이렇게 쏟아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영화가 완전히 실망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클라이맥스 이후로는 꽤 오래 여운이 남았습니다. "이제 강을 건널 때입니다"라는 대사가 극장을 나와서도 한참 머릿속을 맴돌았는데, 그 강이 삶과 죽음의 경계이기도 하고, 왕이라는 역할과 이용이라는 한 인간 사이의 경계이기도 하다는 걸 천천히 정리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걸 남긴 영화구나 싶었습니다.

역사적 맥락을 조금 더 짚어보면, 단종(端宗)은 조선의 제6대 왕으로 즉위 당시 나이가 만 열두 살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단종은 1457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뒤 영월에 유배되었고, 같은 해 사사(賜死)되었습니다. 사사란 왕명으로 사약을 내려 죽게 하는 형벌을 말합니다. 이 비극적 역사가 얼마나 오래 한국인의 집단 기억에 남아 있는지는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원문 서비스에서 관련 기록을 직접 확인해 보셔도 알 수 있습니다.

계유정난을 소재로 한 작품은 적지 않지만, 이 영화처럼 권력의 향방이 아니라 유배지의 작은 인간 관계에 카메라를 고정시킨 시도는 드뭅니다. 그 방향 자체는 옳았다고 봅니다. 장훈 감독이 일관되게 주변부 인물의 시선에서 역사를 재해석해왔다는 것은 필모그래피를 보면 분명히 보이는 특징인데, 이번 작품도 그 연장선에서 읽힙니다. 다만 그 시도를 뒷받침할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조금 더 다듬어졌다면 훨씬 나은 결과물이 나왔을 것입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영화 용어가 있습니다.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세트, 의상 등을 통해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는 연출 방식을 말합니다. 이 영화는 미장센의 측면에서 단종 파트만큼은 상당히 공들인 흔적이 보였습니다. 영월의 청령포를 재현한 세트와 조명 설계는 그 고립감을 시각적으로 잘 잡아냈습니다. 한국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 지원 현황 자료를 참고하면 이 규모의 시대극이 현재 한국 영화 산업에서 얼마나 어렵게 만들어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어려운 조건에서 이 정도 미장센을 뽑아낸 건 분명 인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연휴에 부모님 모시고 다시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가 최근 몇 년 새 많지 않았는데, 이 영화는 그 목록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완성도가 고른 영화는 아닙니다만, 유해진이라는 배우 한 명이 그 불균형을 상당 부분 메워냅니다. 사극을 평소에 즐기지 않는 분이라도, 역사를 몰라도 충분히 울 수 있는 장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단, 전반부의 개그 파트에서 인내심이 좀 필요하다는 건 미리 말씀드립니다.

--- 참고: https://youtu.be/_DvnvAVO5rk?si=LemaQHYrk9DJ5W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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