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맨끝줄 소년 감상 후기 (드라마, 최민식, 흡입력)
6부작이라길래 가볍게 틀었다가 그날 밤 통째로 다 봤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맨끝줄 소년'은 열등감에 짓눌린 교수와 수상한 학생 사이의 심리 게임을 그린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최민식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볼 이유는 충분하지만, 막상 보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 드라마, 대체 뭘 보여주려는 건가
국문학과 교수 허문호는 오래전 소설 한 편을 냈다가 혹평을 받은 이후, 새 작품을 내지 못한 채 강단에 서 있습니다. 겉으로는 교수지만, 속으로는 실패한 작가라는 자의식을 지우지 못한 인물입니다. 어느 날 과제로 받은 학생 소설 중 하나가 유독 눈에 띕니다. 강의실 맨 끝줄에 앉은 이강이 쓴 글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강의 소설이 순수한 창작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글은 이강이 지금 겪고 있는 실제 상황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픽션(fiction)과 논픽션(non-fiction)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허문호라는 인물은 이야기에 끌려들기 시작합니다. 픽션이란 사실이 아닌 것을 상상으로 구성한 서사 형식을 뜻하는데, 이 드라마는 그 경계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가장 핵심적인 장치로 사용합니다.
원작은 스페인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의 희곡 '맨끝줄 소년'입니다.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2012년 영화 '인 더 하우스(In the House)'를 만든 바 있습니다. 원작 영화는 두 사람이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아파트 창문들을 바라보며 "어느 집이든 들어갈 방법이 있다"고 속삭이는 열린 결말로 끝납니다. 희곡의 파멸적 결말과는 결이 전혀 다릅니다. 드라마 버전은 그 두 결말 사이 어딘가에 자리를 잡는데, 그 위치를 스스로 확인해가며 보는 재미가 상당합니다.
연출은 '우리들의 블루스', '그 겨울 바람이 분다', '트렁크' 등을 만든 김규태 PD가 맡았습니다. 각본은 장명우 작가가 썼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연출의 속도 조절이 꽤 탁월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너무 빠르면 캐릭터에 감정 이입이 안 되고, 너무 느리면 지루해지는데, 이 드라마는 그 사이를 아주 능숙하게 타고 있었습니다.
최민식의 찌질함이 왜 이렇게 무서운가
배우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허문호 역의 최민식은 이 작품에서 그간 보여줬던 강렬함과는 조금 다른 결을 꺼내 들었습니다.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완전히 무너진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인물, 즉 나이 든 교수의 찌질함을 품위 있게 연기해야 하는 역할입니다. 범죄와의 전쟁, 악마를 보았다, 카지노 등 전작들의 잔상이 살짝살짝 비치면서도 전혀 새로운 인물로 보이게 만드는 것, 그게 최민식이라는 배우의 내공입니다.
그렇다면 이강 역의 최현욱은 어떨까요? 솔직히 처음엔 최민식과 같은 화면에 세워졌을 때 눌릴 것 같다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보니 그 우려는 기우였습니다. 비밀스러운 듯 하면서도 천진해 보이고, 그러면서 반전까지 소화해야 하는 복잡한 캐릭터를 연기 내공이 쌓인 상대 앞에서 전혀 밀리지 않고 받아쳐냈습니다.
서사적 긴장감(narrative tension)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야기 안에서 인물 간의 힘의 균형이 흔들리며 생기는 불안한 에너지를 뜻하는데, 이 드라마의 허문호와 이강 사이에는 그 긴장감이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하게 유지됩니다. 성공한 동창 김수훈 역의 허준호, 그의 아내이자 허문호의 짝사랑이었던 아느주 역의 김윤진, 허문호의 아내 역의 진경까지, 조연진도 구멍이 없습니다. 이강의 친구 김세윤 역을 맡은 이진우는 아이돌 그룹 고스트나인 출신인데, 제 경험상 요즘 아이돌 출신 배우들이 과거와는 달리 연기력 면에서 크게 흔들리는 경우가 드뭅니다. 이진우 역시 그 흐름에 딱 맞는 케이스였습니다.
흡입력의 정체, 열등감이라는 보편적 감정
왜 이 드라마가 흡입력이 있는 걸까요? 제가 보기엔 열등감이라는 감정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허문호는 나보다 잘 나가는 작가, 내가 짝사랑했던 사람과 결혼한 동창, 그 모든 것이 누적된 열등감 속에서 살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강은 처음부터 그 심리를 읽고 접근합니다. 자기 친구 김세윤은 잘생기고 집도 잘 살고 부모도 화목한 반면, 자신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아버지 병원비를 감당하는 처지라는 것, 그 대비를 허문호가 공감할 거라는 걸 이강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저는 한동안 멈칫했습니다. 허문호가 너무 찌질하고 못됐는데, 이상하게 그 심리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저 사람을 깎아내려서 내가 조금이라도 우월해지고 싶다는 그 심리,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있지 않을까요? 다만 그걸 극단까지 밀고 가느냐 그러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 이 작품이 단순한 스릴러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심리적 투사(psychological projection)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 감정을 타인에게 덮어씌워 해석하는 심리 기제를 뜻하는데, 허문호가 이강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을 겹쳐 보는 장면은 그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이강은 그 틈을 정확히 파고든 것이고요. 이런 심리 기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Psychology Today의 관련 아티클을 참고해보실 수 있습니다.
희곡, 영화, 드라마 세 버전을 비교해보면 같은 이야기가 매체에 따라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완성되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드라마 버전은 6시간이라는 러닝타임 덕분에 인물의 심리를 훨씬 촘촘하게 쌓을 수 있었고, 그 점이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했다고 봅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딱 한 가지 걸렸습니다. 이강의 행동 동기, 그 마지막 선택이 충분히 설득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제 경험상 어떤 이야기든 캐릭터의 극단적 선택에는 그만한 무게가 쌓여있어야 공감이 됩니다. 그런데 이강의 경우, 그 계기가 되는 관계가 지속적이고 깊은 것이 아니라 단발성에 가까워서, 마지막에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의아함이 남았습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인물이 변화하거나 선택에 이르게 되는 내적 여정을 뜻합니다. 이강의 캐릭터 아크는 외부 사건으로는 충분히 그려졌지만, 그 선택의 내적 당위성 측면에서는 조금 더 분량이 필요했습니다. 반전 장치로 쓴 사고 목격 장면도 "하필 그 순간에?"라는 감이 살짝 남긴 합니다. 물론 그 장치 덕분에 뒤의 이야기가 감춰질 수 있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조금 더 자연스럽게 설계됐더라면 했다는 아쉬움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이 드라마의 완성도를 평가하자면, 아쉬운 부분은 마지막에 가서야 느껴지는 것들이었고, 그 전까지는 거의 내내 몰입 상태였습니다. 아래는 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 알아두면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는 포인트들입니다.
- 원작 희곡 '맨끝줄 소년'(후안 마요르가 저)의 파멸적 결말과 드라마 결말을 비교해보기
-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인 더 하우스'(2012)에서 열린 결말이 어떤 느낌인지 먼저 확인하기
- 허문호의 열등감이 어느 순간부터 자기기만(self-deception)으로 전환되는지 지켜보기. 자기기만이란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현실을 해석해 진실을 외면하는 심리 상태를 뜻합니다
- 이강이 처음부터 허문호의 심리를 알고 있었다는 전제로 처음 두 편을 다시 보기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의 서사 경향에 대해서는 영화진흥위원회(KOFIC)에서 매년 발간하는 한국 콘텐츠 동향 보고서에서 관련 분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youtu.be/gRiNUuE6tTM?si=EyG66L48tEqRaV5s